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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상징문 현판에 대하여

기사승인 2018.12.16  15: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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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종고회 회장 
전 여수시의회 의장

“여수는 세인의 입으로 감히 부르기조차 힘든 고장”

현대시조의 선구자이신 노산 이은상 선생은 '태양이 비치는 길로'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여수를 이렇게 표현했다.

이어 그는 “임진왜란으로 국가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있을 때 여수를 중심으로 한 5관 5포 영민 들은 온몸을 다 바쳐 국난을 극복했다.”며 “조선 천지에 여수만 한곳이 없다”라고 칭송한 고장이다.

이렇듯 우리는 선조들이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던 숭고한 충절의 고장에서 태어나 이분들의 정신이 깃든 역사적인 터전에서 여수시민으로 강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며 살아가고 있다.

이런 충절이 깃든 여수시에 살고 있으면서도 이곳이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본영이었다는 사실조차 되새기지 않는다. 심지어 여기가 ‘삼도수군통제영’이었음을 잘 모르는 사람도 많다.

아마 그 용어조차 생소한 사람도 있을 것이며 추상적으로 어렴풋이 역사의 도시 정도로 알고 있는 시민들도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시 말해 ‘삼도수군통제영’하면 모두들 통영시를 떠 올린다. 경남 통영시는 지명도 통제영에 유래된 탓에 당연히 임진왜란 발발부터 ‘삼도수군통제영’은 통영시에 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정보망 상으로도 통영을 삼도수군통제사의 군영이라고 표기하고 있어 오해하기 쉽상이다. 물론 통영 역시 ‘삼도수군통제영’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전라좌수사이던 이순신장군은 1592년 5월4일 옥포대첩을 필두로 여러 해전에 출전하여 연신 승리를 거두었다. 그 위업을 높이 사 다음 해인 1593년 8월 15일에 전라좌수사 겸 초대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요컨대 ‘삼도수군통제영’은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시기였던 1593년부터 1601년까지 여수에 있었고 1601년 이후로 통영에 있게 된 것이다.

삼도수군통제사는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의 수군을 총지휘하는 조선시대 정2품 관직이며, 이때 전라좌수영이던 진해루(진남관 전신)가 삼도수군통제영으로 격상된 것이다. 따라서 원래 ‘삼도수군통제영’은 여수에 있는 진해루 (진남관 전신)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삼도수군통제영’은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시기였던 1593년부터 1601년까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여수에 있었고 전쟁이 끝난 후 1601년에 경상우수영이었던 통영으로 옮겨가게 된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문화재를 통해 역사적으로 이미 입증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 여수시가 제대로 홍보하지 않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삼도수군통제영’이 통영에 있었다고 인식하고 있는 국민들이 많다.

이에 이런 인식을 바로잡기 위하여 여수시는 ‘삼도수군통제영’이 우리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많은 홍보를 해 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 여수의 역사를 바로 알고 바로 잡는 것이 무엇보다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번 여수시민의 혈세인 시비 29억을 들어 소라면 대포리 자동차 전용도로에 상징문이 세워진다.
예컨대 문으로 단정 지으려면 일반적인 문의 위치상 여수시 초입에 세워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를 무시하고 한참을 여수로 진입하여 자동차들이 급하게 움직이고 있는 협소한 자동차 전용 도로에 위에 설치되었다.

이에 위치 선정부터 이의를 제기한바 있었으나 이미 많은 시비가 투입되어 위치 선정 문제는 더 이상 거론할 수 없었다.

또한 여수 상징문 현판조차 여수시는 편향된 설문조사와 여론조사로 ‘여수문’이라 칭한다고 하니 실소를 금할 길 없다. 대대손손 자손에게 물려 줄 상징적인 역사문에 대하여 다시 한 번 검증된 여론 기관에 맡겨 시민의 목소리가 어디에 있는지 귀를 귀울려야한다.

여수 상징문 현판에는 반드시 여수시를 상징하는 역사적인 문구는 꼭 들어가야 한다. 여수시민뿐만 아니라 여수를 찾고 있는 많은 관광객들에게 여수 상징문을 통해서 여수의 역사를 알리고 홍보하는 것이 우리 시민들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이곳 여수가 ‘삼도수군통제영’이었다는 사실을 여수시민 뿐만 아니라 전 국민에게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한 구국의 성지임을 알려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수문이 아닌 삼도수군통제영이 들어간 여수 상징문이 되어 단순한 문의 역할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개선문으로서 여수를 알리는 랜드마크로서 역할이 되어야한다.

여수투데이 webmaster@ystdnews.com

<저작권자 © 여수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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